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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게시물 상세 내용
(175) 상주시 낙동면 숭충사(崇忠祠)
번호 20473 작성일 2019.07.22 조회수 93
작성자 김광희
첨부파일 파일받기 20190718. 숭충사2[크기변환].jpg
파일받기 20190718. 숭충사5[크기변환].jpg
  • 상주시 낙동면 숭충사(崇忠祠)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 124-25

    백두대간 여남지맥상 수선산(修善山, 683.6m)에서 동으로 나가 옥녀봉에 닿기 전에 다시 북으로 복우·삼봉산을 빗고, 불현(佛峴)을 넘어 다시 매봉을 이루고, 낙동강으로 인하여 더 나아가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강과 함께 달리니 「나각 소맥」으로 부르고, 끝자락은 구름다리로 유명세를 자랑하는 나각산(螺角山, 240.2m)이다. 낙동파출소에서 낙동중학교 입구 왼편 이 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신도비(神道碑)와 조금 위에 동향(東向)의 숭충사(崇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대부분 잘 알지 못하여 그냥 지나친다.

    상산지 충절 편에는「李惇敍延安人丙亂殉節江都 肅廟朝 命旌閭 當宁朝 贈吏曹判書諡忠愍(연안인이다. 병자호란 때 강도에서 순절하였다. 숙종 때 정려가 하명되었고, 순조 때에 이르러 이조판서가 증직되었고, 시호 충민이 내려졌다.)」라 적고 있다.

    이 사당은 본래 이돈서(李惇敍, 1599~1637)의 부조묘(不跳廟)로 송계리에 있었는데, 충민사(忠愍祠)였었다. 송계는 낙동면 장곡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시대 연안(延安) 이씨(李氏)가 처음으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마을 뒷산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마을 앞에는 사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송계(松溪)라 하였다.

    공(公)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륜(子倫), 호는 만사(晚沙),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부호군 기설(基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참봉 허진(許禛)의 딸이다. 중조(中祖) 습홍(襲洪, 太子 詹事)의 16 世로 정려(旌閭)로 이름난 가문 장령공파(掌令公派)이다. 부지암으로 찾아와 문인이 되었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무(茂)이시니 당 중랑장(唐中郞將)이고, 행고(海皐) 광정(光庭) 「乙巳譜」서(序)에는 『世傳 唐 李某가 蘇定方을 따라와 百濟를 平征할 때 功을 세워 食菜 延安하니, 延安 李氏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라 적고 있는데, 상계(上系)는 알 수가 없어 중조를 1 세조로 한다.

    공은 1627년(인조 5)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선산으로 피난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성으로 들어갔다가, 그 성이 적에게 함락되자 마니산(摩尼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병에게 잡혔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면서, 함께 잡힌 유옹(柳雍)과 함께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하여 죽기를 맹세하고는 적에게 끌려가다가 진강리(鎭江里)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는 39세이다. 부(父)가 절사(節死)하니 네 아들은 가계를 잇기 위하여 장자(長子) 후강(后綱)은 경상도로, 차남 후방(后昉)은 전라도로, 삼남은 김포로 각각 피난하였다.
    그때 후강은 상주 낙동 송계에 피신하여 난(亂)이 평정되면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여의치 못하여 상주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그 후 1706년(숙종 32)에 충신으로 정려(旌閭)와 불천위(不遷位)를 사액(賜額)하였으며, 1824년(순조 24)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백씨(伯氏) 돈오(惇五, 忠顯公)와 함께 강화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되었다. 이 집안은 육대 사액 십삼 정려기(六代賜額十三旌閭記)가 전하는데, 충신 2, 효자 7, 열녀 1, 절부 3이다. 충민공(忠愍公)의 시장(諡狀)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이른 김시근(金蓍根)이 찬(撰)하였다.

    순조실록 27권(순조 24년 3월 21일)에는
    「吏曹因尙州幼學李重林上言回啓, 請江都殉節人李惇敍特贈正卿, 從之。禮曹啓言: "忠烈祠入享諸賢, 擧蒙贈爵贈諡之典, 而獨不及李惇敍, 實爲未遑之事。今因後孫呼籲, 旣擧正卿, 贈典則特爲贈諡, 恐合一視之政。…(이조에서 상주의 유학 이중림의 상언으로 인해 회계하여, 강도에서 순절한 사람 이돈서(李惇敍)에게 특별히 정경을 추증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충렬사에 입향된 여러 현인은 모두 증작·증시의 은전을 입었는데, 유독 이돈서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으니 실로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던 일입니다. 이제 후손의 호소로 인하여서 이미 정경을 증직하였으니 특별히 증시하는 것이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는 정사에 합치될 듯싶습니다."…)」라 적고 있다.

    공의 유택은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 수정봉 아래 정부인 경주 이씨와 합분이며, 충민사는 상주~영천 간 고속국도 건설 편입으로 인하여 송계동에서 2013년 낙동으로 옮겨 건립하였다. 아담하고 깔끔하게 경모재(敬慕齋)를 신축하였으며, 숭충사 내 검붉은 정려판에는「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忠愍公李惇敍之門崇禎紀元後再丁亥肅廟三十三年命旌四甲申今上二十四年贈官諡」라 적었고
    또한, 신도비 명문은「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忠愍公神道碑」라 새겼는데, 귀부(龜趺)에 이수(螭首)를 얹어 아주 장대하다.

    ‘영양남씨난고종택세고’에는 공의 차자 동지중추부사 이후방(李后昉)을 애도하는 만시(挽李同知 后昉)가 전하는데, 「淸寒家世世相承 華閥靑丘較孰能 齒德俱尊兼以爵 子孫甚夥至于曾 板輿南下養無缺 旅櫬北歸悲不勝 末契平生違一拜 終敎此恨也塡膺(청빈한 집안 전통 대대로 이어 왔으니, 우리나라 어느 문벌이 이 집과 다투랴. 연세 덕망 모두 높고 작위도 겸했으며, 자손들이 아주 많고 증손까지 이르렀네. 가마가 남으로 내려가 흠 없이 봉양했는데, 상여가 북으로 돌아가 슬픔 가누지 못하네. 후배로서 평생토록 절 한 번 못 드리니, 끝내 이 한스러움에 가슴이 미어지네.)」이다. 공의 맏아들 이후강(李后絳)은 상주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유택은 나각산 북록 송내이고, 차남 후방(后昉)은 동지중추부사를, 삼남 후항(李后沆)은 문과에 급제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유복자인 넷째 후잠(后潜)이 있다.
    이처럼 훌륭한 가문의 문화유적이 우리 상주에 있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로서 나각산을 오를 때 한 번쯤 마음을 다잡아보기를 바란다.(참고: 웅주전고, 연안이씨첨사공파대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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