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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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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 성종 14년(995년) 오늘날의 도제(道制)를 최초 실시하여 전국을 10道로 나누고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지방장관인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상주는 영남도(嶺南道)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는 절도사가 위치하였다.
  • 이때 경주는 영동도(嶺東道)라 하여 경남지역 9주 35현, 진주는 산남도(山南道)라 하여 역시 경남지역 10주 37현을 소관하였다.
  • ※ 전국 10道 영역현황
  • ① 관내도(關內道 : 경기 · 황해도)
  • ② 중원도(中原道 : 충청북도)
  • ③ 하남도(河南道 : 충청남도
  • ④ 강남도(江南道 : 전라북도)
  • ⑤ 영남도(嶺南道 : 경상도 일부)
  • ⑥ 영동도(嶺東道 : 경상남도 일부)
  • ⑦ 산남도(山南道 : 경상남도 일부)
  • ⑧ 해양도(海陽道 : 전라남도)
  • ⑨ 삭방도(朔方道 : 강원 · 함경남도 일부)
  • ⑩ 패서도(浿西道 : 평안도)
  • ⇒ 오늘날 경상도 지역을 일명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千年前 영남도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 현종 3년(1012년) 상주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를 관할하였고 同 5년(1014년)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를 경주로 옮기고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 고려시대 왕명 및 공문서 전달, 지방관 및 관원의 파견, 특수물자 수송 등을 위하여 전국에 525개소의 역참(驛站)을 정비하였고 중요 간선도로를 주요지명을 따서 22道로 나누었다. 이중에 상주를 거쳐가는 尙州道의 속역(屬驛)은 유곡(문경), 낙동(상주), 철파 · 안계(의성), 지보(용궁), 송제(임하), 문거(청송) 등 25역이 있었고 경산부도(京山府道)는 낙산(상주), 김천, 안림(고령), 회동(영동) 등 25역이 있었다.
  • ☞ 역참 : 역말을 갈아타는 곳으로 오늘날의 우정(郵政) 또는 숙박업소 등의 역할을 하였다.
  • 현종 9년(1018년)에 전국을 5道·兩界·4都護·8牧制로 정비하였는데, 이 제도는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때부터 상주는 목사(牧使)가 설치되었고 상주목(尙州牧)은 관내 7郡 18懸 2知事府를 지휘 · 감독하는 계수관(界首官)이었다.
  • 당시 상주목 관할은 문경 · 용궁 · 개령 · 보령 · 함창 · 영동 · 해평군(의성 · 군위 등 17현)의 7개 군과 안동부의 임하 · 예안 · 의흥군(봉화등 10현)을 비롯한 경산부의 고령군(대구 · 칠곡등 10현)이 소속되었다.
  • ※ 전국 8牧 현황
  • ① 상주(尙州) ② 광주(廣州) ③ 청주(淸州) ④ 충주(忠州)
  • ⑤ 진주(晋州) ⑥ 전주(全州) ⑦ 나주(羅州) ⑧ 황주(黃州)
  • 지방장관인 절도사는 지방관리의 행정을 사찰하고 승진과 면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후에 안찰사, 안렴사, 도관찰출척사등 여러명칭으로 바뀌었다.
  • 고려 고종 41년(1254년) 몽고군의 6차 침입시 몽고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충주산성·상주산성을 공격 하였으나, 상주산성은 은척 황령사 승 홍지(洪之)의 반격으로 과반수를 잃고 남쪽으로 물러 갔다.
  •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러고 있다. 오늘날의 경상도 명칭은 이 때 탄생하였다.
  • 조선시대
  • 경상도 감영(監營)이 고려말에는 경주에 있었으나 태조 원년(1392년)에는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하였고, 태종 8년(1408년) 8월까지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사를 겸 하였다.
  • ※목사(牧使)는 대개 행정구역 명칭이 州로 되어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직급은 정3품이지만 보다 높은 품계를 가진 사람이 임명되는 경우가 있어 정2품이 임명될 경우에는 영목사(領牧使), 종2품일 경우에는 판목사(判牧使)라 하였다.
  • 지방수령중 가장 품계가 높은 것은 종2품의 부윤으로 관찰사와 격이 같았으며, 관찰사가 부윤을 겸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부윤을 설치한 곳은 평양 · 함흥 · 의주 · 광주 · 경주 등이 있었다.
  • 군사적인 용도로 설치한 대도호 부사는 안동 · 강릉 · 영변 · 창원 · 영흥등에 설치하였다.
  • 지방장관인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 · 사법·군사권을 장악 하였고 임기 동안 관찰을 순력(巡歷) 하는 행영체제(行營體制)였으나, 조선중기 임진왜란 이후 유영체제(留營體制)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보좌관으로 도사(都事) · 판관(判官)등이 있었다.
  • 태종 13년(1413년)에는 전국을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황해 · 함경 · 평안도의 8道로 나누어 지방체제를 정비했다.
  • 이 때 道 단위간의 구역조정이 있었으며, 오랫동안 상주 관할에 속하였던 청원 · 옥천 · 보은 · 영동 · 황간 일대가 충청도에 이관되었다.
  • 조선초기의 지방제도가 고려말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태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주명위주 (州名爲主)로 道名을 바꾸어 8道체계를 확립하였다.
  • 당시 상주 관할의 경상도는 오늘날의 부산 · 대구 · 울산광역시와 경상남 · 북도를 포함한 지역으로서 전국 지방제도 중 가장 넓은 면적이었다.
  • ※ 8道 지방체계 및 감영(監營) 설치 현황
  • ① 경기도(한성) ② 강원도(원주) ③ 전라도(전주) ④ 황해도(해주)
  • ⑤ 평안도(평양) ⑥ 함경도(함흥 또는 영흥) ⑦충청도(충주) ⑧ 경상도(상주)
  • 경상도가 타도(他道)에 비하여 인구가 많고 지역이 넓어 태종 7년(1407년)에 낙동강을 경계로 서쪽은 右道, 동쪽은 左道로 구분하여 右道감사는 상주목사가, 左道감사는 경주부윤을 겸한적이 있었다.
  • 조선 세조 3년(1457년) 각 道에 군사조직인 진(鎭)이 설치되어 상주목은 목사겸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두었다가 곧 진으로 환원되었다.
  • 세종 30년(1448년) 7월에서 단종 2년 7월까지 6년간 4명의 경상감사가 상주목을 겸하였고, 세조 11년 (1465년) 9월 도관찰출척사를 관찰사로 고쳐 부르게 하여 조선후기까지 이어 졌다
  • 연산군 3년(1564년) 11월 이극균(李克均)이 경상우도 지도(慶尙右道 地圖)를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 중종 14년(1419년)에도 경상도 업무가 과중하다 하여 종전처럼 구분하여 우도감사(右道監司)는 상주 목사를 겸하고 좌도감사(左道監司)는 경주부윤을 겸하게 하는 등 일시적으로 2명의 감사를 두기도 하였으나 곧 환원 되었다.
  •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도로가 불통하여 左道는 경주, 右道는 상주에 감영을 설치하였 으며, 同 26년(1593년)에 다시 환원하여 星州의 칠곡현(현재의 칠곡군)에 임시 감영을 설치하고, 同 28년 (1595년)에는 다시 左·右道로 나누어 감영을 분리하였으며, 同 29년(1596년)에는 달성군에, 1599년 (선조 32∼33년)에는 안동에 임시 설치하였다가 1601년(선조 34년)에 대구로 옮겼다.
  • 1592년 11월 상주 가판관(假判官) 정기룡이 尙州城을 탈환하였다.
  • ※ 조선초기부터 중기까지 201년간 상주에 설치한 경상감영이 임진왜란 7년을 통하여 수차례 감영을 옮기는 수난을 당한 것은 1592년 4월 북상하는 왜군을 상주에서 맞닥뜨린 이일(李鎰)의 관군이 북천(北川)에서 대패(大敗)하여 상주성이 함락되고 신립(申砬)마져 충주에서 전사하여 서울에서 남쪽으로의 교통이 마비되어 제 기능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상주 감영은 대구 감영이 정착되어 韓末(1894년)까지 존속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 선조 35년(1602년) 정경세(鄭經世)등이 임란후 만연하는 질병(疾病)을 퇴치할 목적으로 청리면 율리에 민간 최초의 사설의료기관 존애원(存愛院)을 건립하였다.
  • 영조 25년(1749년) 상산지(商山誌)를 증보할 당시 상주목 관할 31懸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내동 · 내서 · 내남 · 내북 · 중북 · 중동 · 단동 · 단서 · 단남 · 단북 · 외동 · 장천 · 청동 · 청남 · 공동 · 공서 · 공남 · 모동 · 모서 · 화동 · 화서 · 화북 · 은척 · 외서 · 외북 · 영순 · 산동 · 산서 · 산남 · 산북 · 대평)
  • 고종 6년(1869년) 10월 임진난(1592년)후 폐허된 尙州城을 목사 남정학이 수축중 이임하자 1870년 후임목사 민치서가 北門등 4대문을 중수하고 1871년 목사 조병로가 계속 수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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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 수정일
  • 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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